2023.12.02 (토)
 
기사검색
 
우리동네 맛집
느린 시간속 여행
기업탐방
> 탐방 > 느린 시간속 여행
2023년 03월 13일 (월) 12:36 [제 897 호]
1960년대 이화양장 큰딸 이신화 대표

“이대는 이대스러웠으면 좋겠어요”
이대앞에서 태어나 한곳에서 살아온 토박이
문화와 특별함이 빛나던 시간들, 지금은 모두 사라져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이화양장점 자리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이대 토박이 이신화 대표
△이대앞 같은 거리에 서 있는 5살의 이신화 대표
△60년을 뛰어넘은 최근의 이신화 대표가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같은 모습으로 뛰어내려오고 있다.뒷편의 나무만이 그대로 남아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요즘 이대골목은 오피스텔의 숲이다. 예전의 건물들이 사라지고 차곡차곡 생기기 시작한 빌딩 건물들은 생경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하다.
그나마 문을 열었던 주변의 옷가게며 패션소품점과 거리 노점들도 문을 닫거나 이대를 떠났다.
1960년생 이대앞에서 태어나 지금까지도 이대 부근에 거주하고 있는 이신화 대표를 만나 패션의 메카였던 이화여대 앞 을 찾아가 본다.

1960년대 이신화 대표의 어머니 이일순 사장이 운영하던  이화양장점이 있을 당시만 해도 이대앞은 크고 작은 양장점이 많았다.
『5살인지 6살때쯤 번데기 아저씨가 구름판을 돌려 뾰족한 송곳을 던져 찍으면 그 만큼 번데기를 퍼주셨던 기억이 나요. 골목 안으로는 채소가게와 고개를 파는 푸주간이 있었고 시장 건너편으로는 다주쇼핑센터가 있어서 미제 물건을 팔곤 했어요』
당시 월남전 상이용사들에게 제공하던 사택들이 이대 부근에 있어 그곳에 살던 친구들이 같이 학교를 다니며 골목길에서 놀았었다.

당시만 해도 주택가였던 이대 앞에는 대현시장이 있었는데 신촌시장은 좌대가 있는 시장이었지만, 대현시장은 흙길 난전에서 장사를 했다. 
10살때쯤에는 천막을 친 난전에서 연탄위에 솥을 걸고 죽을 파는 집들이 기억난다.
이신화 대표의 어머니는 군용가방을 만드는 미상사였다. 16살 무렵 재단과 디자인을 배워 성인이 되면서 이대 앞에서 양장점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도둑이 많아 천을 훔쳐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군복을 리폼해달라는 손님들도 있었는데 옷을 리폼하다 보면 이와 석회가 나올만큼 어렵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하던 이화양장점에서는 이대강당에서 열렸던 공연의 티켓예매를 하기도 했다. 폴모리아 악단같은 유명한 공연이 열릴때는 이화양장점도 덩달아 바빠졌다.
놀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골목대장이었던 이신화 씨는 항상 즐거웠다. 창천국민학교를 다니다 4학년때 대신국민학교로 전학해 5회 졸업생이된 그녀는  국민학교 시절 각목에 손잡이를 달아 총으로 만들어 저녁이면 여자친구들을 모아 담력놀이를 했다. 
지금은 폐쇄됐지만 이대부속초등학교 앞 돌다리가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철길을 건너다 사람들이 기차에 치어 사망하기도 했다. 그 뒤 그 곳은 폐쇄됐다.

못을 주워 기차가 오기 전에 철로에 놓아 표족한 표창으로 만들어지면 친구네 집 대문에 과녁판을 만들어 어디까지 다녀올지를 정해 담력을 시험했다. 공사장에서 나온 깨진 기왓장을 갈아 공깃돌을 만들어 쓰기도 하고 비석치기도 했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맞았던 그녀는 홍익여중고를 다니고 이화여대 건강교육과에 진학했으니 말그대로 찐 이대 토박이인 셈이다.

어머니가 하던 옷만드는 일이 좋아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고생한다는 어머니 반대에 다른 전공을 선택했다. 하지만 손재주는 타고 났는지 지금도 홈패션을 배워 직접 만드는 일이 좋다. 이신화 대표는 한때 이대앞에서 차공방을 운영했지만 지금은 공방은 접고 지방에 내려가 차를 공부하고 있다.
70년대쯤 양장점을 접으신 어머니는 그 자리에 건물을 지으셨다. 주택가였던 이대앞 두번째 신식건물로 지금은 이디아커피가 운영중인 건물이다.

『70년대를 넘어서면서 기성복들이 브랜드화해서 나오기 시작했다. 반도패션, 논노패션등이  맞춤옷을 앞서 팔리기 시작했어요.』어머니의 건물에는 많은 상점들이 들어왔다 나가곤 했는데 코스모스 다방도 그 중 하나였다. 세시봉의 전신이었던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등 당시 내노라하는 가수들이 코스모스 다방을 빌려 일일찻집을 열었다. 당시 꼬맹이였던 이신화 대표는 가수들은 잘 몰랐지만, 일일찻집이 끝나고 나면 다방안에 팬들이 가져다 놓은 사브레 과자며 웨하스 등 맛난 간식거리가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재즈 가수들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레스토랑도 인기였다. 이대앞에 맥스케빈에는 「향수」로 알려진 가수 이동원 씨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스테이지가 열리기도 했다. 명동에는 비슷한 공간이었던 로즈가든도 유명했다. 그때만해도 클래식을 듣는 파와 재즈나 가요를 듣는 파가 양분화돼 있어 다방이나 레스토랑의 단골들이 나뉘기도 했다.

신식 멋쟁이 여성의 상징이었던 이화여대는 남자들은 출입할 수 없는 금남의 지역이자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었다. 학교안은 나무가 우거져 자연이 좋았기에  신성함은 더욱 돋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대는 누구에게나 개방돼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데다 학교부속건물인 ECC를 건축하면서 지하에 온갖 상업시설을 임대하면서 이대의 상징성은 사라졌다는것이 이신화 씨의 생각이다.

이대앞의 유일한 서점이었던 이화서림을 비롯해 다양한 상점가들이 ECC에 점포를 옮겨 장사를 했지만, 문을 닫거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이대앞 공원부지였던 APM역시 복합상가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빈건물로 방치돼 있다. 1000명이 넘는 소유주들의 뜻을 모아야 매각을 하든 임대를 할텐데 그 구심점이 사라진  APM은 예전 명성을 바닥에 묻은채 높은 건물로만 남아있다. 공원 부근에 자그맣고 아기자기하던 분식점이나 악세사리점, 구두가게 옷가게 들은 일찌감치 홍대로 자리를 옮겼다. 

『2000년대 초반은 재즈바 야뉴스 등 멋진 공간들이 많았어요. 유복성씨라고 봉고를 치며 노래는 부르는 가수도 있었고, 재즈계의 대모로 불리던 박성연씨의 무대를 볼수 있었지요』
LP바로 유명하던 애플과 학다방은 오리지날 백판을 2000장이나 보유하고 있어 라디오 PD가 원판을 빌리러 이대를 찾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이화여대 졸업생이기도 한 이신화 대표가 바라는 이대는 『졸업생들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육공간을 마련하고 졸업생들이 이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공유공간으로 만들어 주면 좋겠다』면서 그래야 졸업생들은 자부심을 느끼며 학교를 찾고, 다시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의미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대는 이대스러우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녀는 학교앞이 온통 오피스텔 숲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기 그지 없다.
학교앞인 대현동 일대에는 클럽이나 유흥시설도 들어올수 없어 예전에 있었던 재즈바나 공연장도 들어설수 없으니 점점 베드타운이 돼가고 있어 안타깝다. 예전 이대의 모습이 이신화 대표에게는 추억으로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옥현영 기자>
ⓒ sdmnews
서대문사람들 카카오톡채널
 

회사소개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광고안내 구독안내
서대문사람들신문사/발행인 정정호  esdmnews.com Copyrightⓒ 2006   All rights reserved.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7안길 38 B동 301호/정기간행물 등록번호 서울다-3012/등록일자 1993.6.8 Tel: 02) 337-8880 Fax: 02) 337-8851